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췌 개헌 (문단 편집) == 경과 == || [[파일:헌병대의_버스_연행.jpg|width=100%]] || || [[헌병대]]가 [[국회의원]]을 버스에 태워 연행하고 있다. ||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26일에 개헌에 반대하던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 국회의원 47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 現 군사경찰]를 동원하여 강제 연행하는 압제를 저질렀으며 10명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를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국회 소장파를 겨냥한 [[국회 프락치 사건]]과 일맥상통한다.] 제헌헌법에는 현행 헌법처럼 회기 중 국회의원에 대한 불체포특권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현행범을 제외한다는 구절을 이용하여 이들이 현행범이라 체포하였다고 우겼다. 이에 국회에서 구속 의원 석방과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부통령이었던 [[김성수(1891)|김성수]]가 사표를 냈으며 UN 한국위원단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 당시 [[유엔군사령부|유엔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인 [[미국]], [[영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내와 국외에서의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6월 20일에 '''[[이시영(정치인)|이시영]], [[김성수(1891)|김성수]], [[김창숙]]''' 등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정치깡패들의 난입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6월 21일 국무총리였던 [[장택상]]의 주도 아래 이른바 “발췌개헌”이 추진되었고 장택상은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가 해산[* 그런데 제헌헌법상 정부에는 국회해산권이 부여돼 있지 않았다. 즉 헌법에도 없는 초헌법적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공갈을 한 건 아니고 당시 야당이 장악한 국회와 달리 여당이 장악했던 지방의회로 하여금 국회 해산 결의를 정부에 올리게 하거나 정치깡패들을 이용하여 의원들은 자진해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식의 관제데모를 지시하여 야당 의원들을 압박하였다.]될 수도 있다”며 의원들을 협박했다. 6월 25일에는 [[김시현(독립운동가)|김시현]]이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압박 속에서 결국 야당은 굴복하고 발췌개헌안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이승만 정권은 억류중이던 10명의 의원을 석방하고[* 개헌을 하려면 재적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은 야당의원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피신 중이던 의원들에 대해서도 신변을 보장할 테니 국회에 등원하라고 호소하거나 군경을 이용해 국회로 연행했다. 7월 4일 밤 국회는 군경의 포위 속에서 '''기립[[표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의회]]에서의 [[표결]]제도는 일반적으로 기립 표결 아니면 거수 표결, 가끔 점호 표결을 한다. 전자투표가 도입된 후 기립표결을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의회에서 표결은 익명으로 진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자세한 건 국회법 112조[[https://www.law.go.kr/%EB%B2%95%EB%A0%B9/%EA%B5%AD%ED%9A%8C%EB%B2%95/%EC%A0%9C112%EC%A1%B0|#]]를 참고하자. 특히 개헌안 같은 경우 위 조문 4항에 따르면 기명투표로 [[표결]]해야 한다.]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빨치산을 계엄의 명분으로 들었던 것과 달리 개헌이 끝나자마자 7월 말에 계엄이 바로 해제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경과 문단 초반부터 읽어 보면 헌정 사상의 최초의 친위 쿠데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친위 쿠데타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인데 당시 상황에 맞게 대입하면 '이승만이 헌병대를 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강제 연행하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성공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이다. 즉 [[쿠데타#s-4.1|친위 쿠데타의 설명]]과 비교해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승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부산에 배치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병력 배치를 거부했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http://db.history.go.kr/id/dh_025_1952_05_27_0050|#]]'를 전 육군에 하달했다. 헌병대를 동원한 것도 이종찬이 거부하자 [[원용덕]] 헌병사령관[* 現 군사경찰 사령관]에게 따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졌고, 결국 이종찬이 총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종찬을 사형 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육군참모차장인 [[유재흥]]의 설득으로 철회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이때 이승만의 이종찬에 대한 극대노는 나중에 뒤끝 작렬 일화로 제대로 보여준다.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부임해 이승만이 장군들을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종찬을 소개하며 대놓고 면전에서 그의 조부 [[이하영]]을 들먹이며 '''이 사람의 할아버지는 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심한 모욕을 준 것이다. 이 일화는 두고두고 이승만이 밴댕이, 간장종지 속알딱지 소인배라고 욕을 먹는 소재로 쓰인다. 사실, 저렇게 말한 이승만 본인은 정작 친일파 출신들을 내각에 등용하여 잘 써먹었다. 내로남불도 이런 내로남불이 없다. 조상 때문에 이 정도의 공개적인 모욕을 당해야 한다면, [[우장춘]] 박사도 마찬가지지만 농림부장관까지 제안받기도 했다. 물론 우장춘 박사가 농업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해서 이승만이 보기에도 참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